EstellaS [1128604] · MS 2022 · 쪽지

2024-10-25 21: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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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생이 수능 망하는 법

게시글 주소: https://video.orbi.kr/00069615689

많은 분들이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에 제목을 좀 자극적으로 지었습니다. 작년에 4수를 한 제가 겪은 일이고, 겪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기 때문에 정말 여러분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나리오도 있구나~ 하면서 미리 대비책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쓰는거고 워낙 혼비백산한 하루였어서 솔직히 기억이 좀 흐릿합니다. 되도록이면 떠오르는대로 쓰지만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사건의 발단, 국어


저는 원래 긴장을 잘 하지 않습니다. 성격이 감정의 동요가 잘 없는 편이기도 하고 좀 침착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현역, 재수, 삼수, 사수 전부 수능 전날조차 꿀잠자고 수능장에 들어갔습니다. 


어디서부터 말렸을까 돌이켜보면, 국어가 시발점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국어에 자신이 좀 있습니다. 특히 작년의 경우 막판에 사설 모의를 풀면 이감이나 상상이나 보통 3틀 안쪽에서 쭉 유지됐었고, 평가원 수능 포함해서 백분위 97 이상은 보통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험을 보나 '어차피 내가 어려우면 대한민국의 96%는 개어려워한다' 라는 생각으로 멘탈 유지도 잘 했습니다. 


그렇게 딱히 긴장하지 않은 채로 1교시 시작. 저는 국어를 순서대로 풉니다. 독-문-선 순서대로요. 독서론을 포함하여 3번째 지문까진 쭉쭉 풀었습니다. 기억상 3번째 지문 끝나고 (가), (나) 지문 들어가기 전에 시계를 봤을 때 9시쯤이었던걸로 기억하네요. 그리고 (가), (나) 지문을 봅니다. 소재도 제가 자신있는 인문 소재입니다. 어라? 그런데 글이 읽히지가 않습니다. 뭔가 조금씩 튕겨나가는 기분이어서 시간이 좀 끌렸지만 그래도 초반 기세에 비해 약간 꺾였을 뿐이지 문제가 되는 시간대는 아니었습니다. 9시 15분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문학을 들어갑니다. 김원전, 연계 열심히 했었기에 제가 봤던 교재랑 인물 호칭은 좀 달랐지만 그래도 무난히 패스. 현대시, 현대시는 연계를 거의 6~7회독 하고 시험장에 들어갔습니다. (나)가 연계인거 확인하고 읽지도 않고 (나)관련 선지를 다 텁니다. 그리고 (가) 읽고 빠르게 패스. 


대망의 현대소설. 도저히 읽히지가 않습니다. 어라? 나는 현대소설을 이해를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이건 진짜 나만 어려운건가? 긴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글이 자꾸만 튕겨져 나가지만 정신을 붙잡고 글을 읽습니다. 다 읽고 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문제가 도무지 풀리지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인물 관계를 잘못 파악했나봅니다. 이럴땐, 문제에 존재하는 모든 선지를 읽습니다. 29~31번의 선지를 읽으면서 지문 내용을 역으로 추론하여 소설을 이해했습니다. 아! 그런거구나. 이해가 된 순간 모든 문제가 주르륵 풀립니다. 그런데 이때 시계를 봤을 때 9시 40분.


고전시가. 열심히 했지만 솔직히 일동장유가는 좀... 그래도 내용은 다 아니깐 문제를 풉니다. 그런데, 34번이 풀리지가 않습니다. 이럴리가 없는데? 하면서 아무리 쳐다봐도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이때 시간이 9시 45분입니다. 슬슬 쫄리기 시작해서 34번을 넘기고 언매로 넘어갑니다.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언매 지문 생긴게 흉측해서 순서를 잠깐 바꿔서 매체부터 풉니다. 긴장이 돼서 그런가 잘 읽히지 않지만 어쨌든 매체도 빠르게 다 풀었습니다. 딱봐도 쉬워보이는 38, 39 먼저 풀었는데 이때 시험시간이 5분 남았다고 합니다. 긴장한 상태로 지문을 읽은 다음에 35, 36을 풉니다.


어? 앞에 34번이 있는데? 그럼 나는 2문제를 못 풀고 낼 수도 있나? 라는 생각을 하며 일단 마킹을 합니다. 그런데 긴장을 해서 그런가 도저히 풀리지가 않네요. 결국 34, 37번을 못 풀고 찍고 냅니다. 


머리속에 온갖 생각이 듭니다. 일단 34, 37은 틀렸고(수능 4번 치는동안 찍맞 딱 1문제 해봤습니다.) 문학에서 실수 했을 것 같은데, 근데 또 독서 한 지문 잘 안읽혔으면 틀리지 않았을까? 이거 나만 어려웠던 지문같은데 나만 시험 못친건가?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쉬는시간이 되지마자 안심이 좀 됐습니다. 같은 고사장 현역들이 어렵다고 해줬거든요. 


참고로 남학생 기준, 같은 고사장에 고3으로 추정되는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학생들이 쉬웠다고 하면 적당히 어렵게 나온거고 개쉬웠다고 하면 약간 쉽게 나온겁니다. 어렵다고 하면 일단 1컷 85부터 스타트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멘탈을 완전히 다시 부여잡고 문제의 2교시로 들어갑니다.



2. 인생 최악의 수학


사실 전과목중에 수학이 가장 불안했습니다. 다만 그건 사설에 의해 학습된 무기력이고, 23수능은 백분위 98이었습니다. 망쳐도 1등급은 받는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출발.


내분점에서 한번 피식 하고, 10번을 푸는데 계산이 좀 꼬입니다. 이럴땐 일단 패스. 실모 풀면서 100번도 넘게 연습했습니다.(참고로, 4번 수능 치는동안 매해 적어도 실모 100회분은 했고 재수때는 적게 잡아도 150회분은 푼 것 같습니다.) 11번은 무난하게 완. 그런데 12번이 어떻게 풀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사실 되게 쉬운건데, 뭔가 다른 상황들이 이상하게 떠올라서 안풀렸습니다. 이런 상황은 진짜 처음인데...? 13번을 푸는데 또 계산이 꼬입니다. 그래도 일단 손도 못댄건 아니니깐 일단 넘기고.. 14번. 14번은 보자마자 답상황을 바로 그렸는데 마무리가 자꾸 안됩니다. 이때부터 호흡곤란이 왔습니다. 말 그대로, 숨이 안 쉬어져서 눈앞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앞서 국어에서 멘탈 타격 입은게 영향을 주었나? 평소에 사이도 좋지 않던 부모님 얼굴도 생각나고 갑자기 눈물도 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시험은 안 끝났습니다. 미적 빠르게 풀고 와서 다시 풀면 되니깐요. 16~18은 쭉 풀고 19에서 한번 턱 막힙니다. 이건 누가 풀어도 시간을 좀 쓸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이 생각이 시험장에서 나지 않아서 몹시 당황했습니다. 다시 눈앞이 흐리어져옵니다. 20번을 푸는데, 이땐 상황이 명확히 기억납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원 작도하면서 본능적으로 계산하던게 떠올라요. 


그리고 21번을 들어가기 전에 시계를 보는데 45분이 지나있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고? 시험 망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21번은 보자마자 논리적 생각 없이 답상황 찍었습니다. 이떄 답이 될 수밖에 없어. 어차피 이런 도박이라도 안하면 시험 망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22번은 비쥬얼 보니깐 어차피 내 문제가 아닙니다. 23~26번 빠르게 풉니다. 27번 음함수. 계산을 하는데 자꾸 결과가 안 나옵니다. 답은 나왔는데 내 답이 선지에 없어요. 28번은 뭔가 심상치 않아보여서 넘기고 29번을 봅니다. 문제 보자마자 어떻게 풀지 다 보입니다. 식 전개, 답 인나옴. 아 진짜 큰일났구나. 시간은 얼마 안 남았는데 못 푼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이거 1등급은 고사하고 2등급은 뜨나? 아니, 2등급 아래로 뜨면 이거 시험 치는 의미가 있나? 어차피 지금 걸어둔 학교보다 못갈텐데? 분명 올해 공부 시작할때 부모님께 최소 약대는 가겠다고 했는데 이게 뭐지?


정말 입속에 침이 하나도 생기지 않고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실시간으로 느끼면서, 그런 지옥속에서도 어떻게든 1문제는 더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15번을 풉니다. 경험상 이럴땐 처음보는 문제를 풀 확률이 높았거든요. 생각이 느려져서인지 쉬운 문제였지만 10분 넘게 박고 풀어서 답을 냈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동안 12, 14, 27, 29를 풀려고 했지만 단 하나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2, 14, 22, 27, 28, 29, 30을 못풀고 찍어서 냈고 제 머릿속에 찍힌 점수는 73이었습니다. 살면서 수능에서 찍맞을 해본적이 없었으니깐요. 



3. 그 이후


점심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듭니다. 시험을 포기할까? 정말 진지하게 했던 생각입니다. 73이면, 1컷이 가령 80이라 쳐도 2컷일텐데 이러면 시험을 치는게 진짜로 의미가 있나? 어차피 걸어둔 학교보다 못갈텐데?

 

정말 수만번 고민했습니다. 시험을 포기할지요. 그러다가 영어시간 직전에 내린 결론은, 어차피 시험은 망했지만 지금 어떻게든 이 상태로 시험 완주라도 해내는 것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그냥 버텼습니다.


막상 이렇게 되니 또 잘 치고는 싶었는지 영어때 또 눈앞이 하얗게 되고 호흡곤란 오면서 평소보다 좀 못치긴 했습니다. 싸가지없는 놈들이 순서 답 44로 해서 멘탈 타격도 좀 컸구요.


영어까지 끝나니깐 그냥 뺴도박도 못하고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끝났구나. 내 1년은 또 허비로 돌아가는구나.


탐구는 정말 해탈한 상태로 봐서 그런지 그냥 평소처럼 풀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장을 나왔습니다. 주변 학생들은 부모님이 반겨주면서 웃고 떠들고 수고했다는 말을 주고받는데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너무나 참담한 심정입니다. 그리고 평소엔 대화도 잘 안하던 어머니께 문자 한 통을 보냈습니다. '엄마 미안해'



4. 결말


결과는 12211입니다. 수학은 실면서 처음으로 찍맞을 객관식에서 하나 해버려서 2컷, 백분위 89가 나왔고 국어 탐구는 다행히도 1이 떠줬습니다. 생각보다 결과가 잘 나와서 결국은 타학교 공대로 옮겨서 다니고 있습니다. 


학원에서 알바를 하고 있어서 6평 오전 교시랑 9평 전체를 현장에서 응시했고 둘 다 매우 좋은 결과를 받아서(특히 수학은 6, 9 모두 96입니다.) 반수도 생각은 해봤습니다. 9평끝나고 그 악몽같았던 작년 수능 수학 시험지를 띄워서 1년만에 다시 마주하고 풀어보았지만.. 문제는 22번만 제외하고 잘 풀렸습니다. 다만 풀면서 계산을 조금이라도 절 때마다 수능과 동일한 호흡곤란이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내 몸은 이미 수능을 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구나를 체감하며 포기했습니다.


사람이 멘탈이 무너지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온몸으로 체감했습니다. 정말 멘탈 깨지면 시험 망친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이정도일줄은 몰랐습니다. 이거 읽으시는 분들은 이런 경우도 있고 이런 사고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이 시험을 이렇게 망쳤구나~를 생각해보시고, 만약 수능때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이걸 떠올리면서 정신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어떻게든 완주하고 나니, 결과는 최악보단 낫더라구요. 


남은 19일 화이팅입니다. 모든 수험생분들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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