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SK문학 [1041575] · MS 2021 (수정됨) · 쪽지

2022-05-08 02: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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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佛法)은 불법(不法)? 과연 '부처님 오신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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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권 문학칼럼]

불법(佛法)은 불법(不法)? 과연 부처님 오신 뜻은?


도대체 불법(佛法)이란 무엇이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불교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특히  '중도'(中道)에 대하여..



1)

5월 7일. 배우 강수연씨가 55세로 별세(別世)했다.

사람의 생애는 의외로 짧고 간단하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생전에 그렇게도 많은 생각과 부산했던 것에 비하면....

'별세' 한 단어로 정리되는 삶 앞에 서면 

비로소 그동안 진행되었던 생각, 행위들이

모두 ‘망상’과 ‘꿈’ ‘허구’요 ‘관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망상과 관념적 허구에서 깨어나 유한한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생생하게 호흡할 것을 거듭 강조한 것이 

붓다의 일관된 가르침이고 

중도(中道)가 그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흐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잘 될 때는 처음부터 잘 되었된 것처럼 

망상에 빠져서 언제까지나 계속 

정점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풀릴 때는 처음부터 하나도 안 풀렸던 것처럼 

변함없이 안 될 것처럼 걱정하고 불안해 한다. 


이것이 바로 고통과 번뇌의 원천이 되는  

대망상(大妄想)이고 관념이고 허구임을 

붓다가 평생을 강조했다.  


사람의 뇌 자체가 자동적으로 망상을 일으키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고 

과거 기억으로 현재를 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을 볼 수 없어서 

수행을 통해서 지금 ‘깨어 있음’을 통해 

자유와 행복을 얻으라고 했다. 


그래서 이러한 ‘깨어 있음’과 ‘관념에서 벗어남’의 효용성 때문에 

종교 중에서 유독 불교가 현대 심리학, 뇌과학, 신경과학의 

탄생과 발달에도 동력을 제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3)

변하고 사라지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게 

서러워서 사람들은 영원한 존재를 생각하기도 하고  

천국과 극락을 만들기도 한다. 


이 세상의 진리는 딱 두 개로 요약된다.

하나는 신(神)을 향한 ‘믿음’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생각으로 만든 망상, 관념은 

모두 허구임을 계속 자각하는 수행을 통한 진리이다.  


앞의 것은 유신론적 신앙의 차원에서 고통과 죽음을 해결하려 하고 

뒤의 것은 관념, 허구, 망상을 철저히 타파해나감으로써 

자유와 행복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한다. 

붓다는 후자를 택했고 철저하게 기존의 지배적인 관념을 깨뜨리고 

지혜와 자비를 강조했다. 

이 두 개의 날개를 활짝 펼치게 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라고 볼 수 있다. 

깨달음과 실천의 핵심으로서 ‘중도’란 

과연 무엇일까? 


4)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89년도 영화로 그 제목이 더 화제였지만 

당대 문화 선진국이었던 인도에서 동쪽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동아시아 불교의 특징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인도불교가 사라진 후 불교는 중국에서 선불교라는 꽃을 활짝 피웠다. 


지금의 한국 불교의 원형도 사실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는가? 

인도불교와 중국불교, 티벳불교, 일본불교, 유럽에 전파된 불교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고 

요컨대 불교는 수천 종류의 인류가 축적해온 지혜의 저장고라고 볼 수 있다.  


5)


불교는 하나이지만 그 내용은 수천만 종류가 있어서 

‘불법(佛法)은 불법(不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고정된 불법(佛法)의 실체가 따로 없을 정도로 다양하기 때문에 

사실 불법(佛法) 아닌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이른바 ‘무유정법’(無有定法), 

말 그대로 

‘따로 정해진 법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 뿌리까지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이 불법(佛法)이다. 


부분만 보면 불교는 횡설수설(橫說竪說)하고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모순의 종교라고 쉽게 오해할 수 있다. 

스님들의 얘기나 복장도 다르고 사찰마다 전통도 다르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게 아주 많다. 


6)

예를 들면 

붓다의 초기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는 상식적인 주장이 있지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살벌한 선불교의 전통도 있다. 

또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의 삼법인을 강조하는가 하면 

대승불교에 오면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을 강조한다.

팔정도를 통한 깨달음과 고뇌의 끝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가 하면 

육바라밀의 실천을 더 우선시 하기도 한다. 


아라한(阿羅漢)의 깨달음을 강조하는가 하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을 염불하기도 한다. 

윤회와 환생을 강조하는가 하면 

그런 건 없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이야기한다.

‘고집멸도’(苦集滅道)를 기본 원리로 삼지만 

‘반야심경’에서는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를 말한다.


초기불교에서부터 유식, 중관, 선불교 등의 대승불교의 형태가 

아주 다양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법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불법(佛法)을 찾으려다가 그 깊은 웅덩이에 빠져 죽은 자도 많다.

그러고도 불도(佛道)는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처럼이나 

쉽다고도 한다. 


7)

불교가 이렇게 횡설수설 이랬다 저랬다 하는 내용이 많은 것은 

전적으로 그 시대와 지역에 맞게 적용되고 변용되었기 때문이다. 


애초 초기불교에서부터 수행의 전문 종교임을 자처한 불교가 차츰 

신앙화되면서 여타 종교처럼 조직화되고 

관념적 성격까지 가미되었다.

영원불변과는 거리가 먼 불교인데도 ‘불성’ ‘영원’의 개념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살아 있는 큰 가르침을 하나 든다면 

역시 ‘중도’(中道)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팔정도, 연기법(緣起法), 삼법인 등의 교설이 모두 

포섭된다고 생각한다. 


8)

이러저러한 이유를 다 빼고 불교가 인류에 기여한 공적이 있다면 

인간의 고질적인 망상과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깨닫게 했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을 실현한 것이 바로 ‘중도적 삶’이다. 

‘중도’(中道)란 한 마디로 ‘지혜로운 마음’의 대명사이고 

삶의 실상에 어긋나지 않은  

‘균형 잡힌 마음’ 또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 자각이 

실현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9) 

‘중도’(中道)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음이다. 

줄이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아서 

거문고의 맑은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고 

말을 쉽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중도적 삶의 균형’이란 얼마나 쉽고

지당한 것이면서도  실천하기가 어려운가?


‘도움’도 지나치면 독(毒)으로 돌아온다. 

‘사랑’도 지나치면 화근이 된다. 

너무 모자라도 원망을 사게 된다. 


학습도 편중되면 망친다.

몰입도 지나치게 하나에만 집중할 때 병(病)이 된다. 

운동도 지나치면 해(害)가 된다.  

그만 둘 때를 놓치면 버림받고 

일어나야 될 때를 지나치면 후회하게 된다. 


지금의 삶이 이대로 계속 되리라는 생각이 

바로 망상이고 

중도적 사유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눈 앞에 피어 있는 벚꽃의 아룸다움까지도 

부정하고 그 순간을 놓치는 것이야말로 

또한 망상이고 중도가 아니다. 


내가 고정된 정체성을 갖고 있다거나 

내가 누구인지 혼란스럽다는 생각도 

중도가 아니다. 

내가 위대하고 고귀하다거나 

반대로 아예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지나치게 하는 것도 중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실상에 맞지 않는 것이 중도에서 벗어난 

삶이다. 


10)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것도 중도가 아니지만 

해야 할 걱정도 안 하고 

무감각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도 중도가 아니다.  

내 생각이 어딘가에 엉켜 있어서 

번뇌 망상에 치우친 것은 

중도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각해야 할 것은 놓치는 것도 중도가 아니다. 


이렇게 보면 중도가 아닌 투성이가 더 많은 

현실 앞에서 과연  

  ‘중도’(中道)란 과연 무엇인가?

중도는 치우친 삶 속에서도  

말없이 흐르고 있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 하루 전

배우 강수연 배우가 숨졌다. 

그 다음날 또 누군가의 유명, 무명인이 

태어나고 숨질지 이 중도의 자연은 말이 없다. 

설령 내가 죽는다 해도 중도는 끄떡없이 숨쉬고 있다. 


'모든 것은 한 때'였고 

지금이 또한 최고의 한 때라는 것을  

중도는 무상(無常)으로 알려주고 있음에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중도는 우습게도 방치되고 만다.  


'중도(中道)'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에만 매달려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중도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지나가고야 말 삶’이기에 

나는 최소한 오늘 이것만큼은 잡아야겠다고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나의 음성을 듣게 될 때 

중도적 실천이 이뤄질 것이다. 


이 중도적 삶의 균형을 이루게 하는 첫걸움이 

바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생각들을 

하나씩 알아차리고 보살펴주는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수행'이다.

수행의 끝판은 결국 

지금 이 순간의 결단이고 행동이다. 

다만 그것이 중도적 실천이어야 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오늘 나의 ‘중도적 삶’은 무엇일까?


사소한 것에도 온 정성을 다해서 

보살피고 집중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는 것이 

'중도'가 된다. 

때로는 눈 앞에 놓여진 것을 

무의식적으로 기계처럼 작업하는 것도 

중도가 될 수 있다. 

공부가 되지 않을 때에는 차라리 

벌떡 일어나 한바탕 움직이고 

내 마음을 편안하게 풀어줄 수 있는 것이 

'중도'가 된다. 

공부가 잘 될 때에는 크게 자만하기보다는 

더 신중하게 빠진 부분까지 챙기면서 

힘차게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 중도가 된다. 


요컨대 '흐름'을 타고 균형을 잡아 

행동하는 것이 중도라고 볼 수 있다. 

더 이상의 고통이 오지 않도록 멈출 것은 멈추고

시작할 것은 당장 일어나 시작하는 것이 중도가 된다. 


유한한 삶에서도 균형을 잡고 살라고 한 것이 

붓다의 뜻이다. 

미적거리지 말고 흐름을 타고 변화해나가라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중도의 길이다.   

  

원하던 것을 다 이뤘다 해도 

원천적인 괴로움이 남아 있지 않은가?

삶과 죽음에 관한 집착이나 두려움에서도 벗어나 

자유로운 흐름을 따라 힘차게 살라고 강조한 것이 

불법의 큰 요지일 것이다.

우리는

중도의 실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성권 문학칼럼] 불법(佛法)은 불법(不法)인가? 부처님 오신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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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破亂국어 · 890512 · 22/05/09 13:14 · MS 2019

    요즘 사는 게 다 뭔가 싶고, 문학 수업에서나 쓰던 번민이니 고뇌니 하는 말들이 관념이 아닌 지금의 고통으로 경험되는 시절이라 우울했는데 정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오르비에서 마음 공부 칼럼을 볼 줄은 몰랐네요.

  • 문제깎는 선변 · 892689 · 22/05/09 22:47 · MS 2019 (수정됨)

    잘 읽었습니다.
    요즘 불교 공부하고 있어서 그런가 더 와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