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내려와 글을 쓰는 수능 11일 전, 일요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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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11일 남았네요.
마지막 논술 인강을 보고 모니터 너머의 선생님에게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들어왔던 강의가 이제 끝이라니..
어쩐지 기분이 야릇해져 무언가 길게 적고 싶어졌습니다.
2월부터 적어온 다이어리를 펴보지만 샤프로 종이에 활자를 꾹꾹 눌러쓴다는 것은 꽤 힘들고 시간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키보드는 참으로 좋은 발명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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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쯤에 너무 힘들어서 오르비에 글을 하나 올렸는데 그것이 캐스트에 올라가 놀라워했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상위권 학생이 아니였고, 무엇보다 상위권 학생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literally 엄친아마저 없었습니다) 1~2등급은 여자친구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존재를 입증할 수 없는 먼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르비는 이것들이 정말 존재하는 사람들 이야기인지 강대는 또 어디고 이런 학원비를 어떻게 감당하는지 재수삼수는 왜 그리 많이하는지 왜 이 사람들이 미친놈처럼 공부만 해대는지하며 새삼 낮설게 느껴지기만 하던 사이트였는데 그런 사이트에 제 글이 떡하니 캐스트에 실리다니요.
'아.. 나도 수험생이긴 수험생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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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다이어리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2월 6일 수요일, 오후 4시 36분
다이어리의 첫 줄을 비로소 쓰게 되었다. 다 내가 귀찮아한 탓이다. 월요일부터 모든 걸 시작하려했지만 미루고 미루다보니 오늘이 되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오늘부터, 지금 이 순간부터 공부를 시작한다.
실제로 다음 날 단어장과 고1정석을 폈다고 하고, 며칠뒤 졸업을 하고 쫑파티를 했다고 써있네요.
2월 18일 월요일, 우호 8시 38분
지금 나는 ㄷㄹ독서실에 와 있다. ... 그들의 시간도, 나의 시간도 서로에게 추억이 될 것이다. 내가 성공한다면 그들이 그들의 추억을 후회할 것이며 내가 실패한다면 내가 내 추억을 후회할 것이다. 나는 성공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논 날의 기록입니다.
일요일날 카톡으로 유혹당해버리고 시내까지 가서 실컷놀고 독서실로 들어와 후회의 심연에 빠져 이런저런 긴 결심을 적어 놓았네요.
이 날 이후로 저는 친구들과 논 적이 없었고, 핸드폰에 기괴한 패턴을 걸어버려 지금 제 청바지 속의 이 패턴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패턴을 많이 시도하면 저절로 폰이 잠.겨.버리더군요.)
어제 밤, 제가 수능 며칠 전에 고향에 내려온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흥청망청 놀고만 있는 제 친구들 중에 홀로 정신을 차리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는 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1시간뒤 도서관에 온답니다.
일요일이라 늦잠을 잤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얼굴보는데 도서관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자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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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부터 5월까지 저는 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집과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도서관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데 저의 조그마한 미니벨로를 끌고 아침 일찍 이 언덕을 오르고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히더랍니다.
도서관 앞, 3~4층 건물 사이로 홀로 우뚝 들어선 주상복합 쌍둥이 빌딩은 뒤늦은 밤, 다시 미니벨로를 이끌고 유난히 골목이 복잡한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을 때면 언뜻언뜻 복잡한 전봇대 전선 사이로 환하게 빛나곤 했습니다.
이 부조화한 스카이라인의 정점을 바라보며 뭔가 복잡한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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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뒤늦게 본 3월 모의고사.
난생 처음으로 언수외 2등급 진입.
(몰론 교육청은 재수생이 안본다는 것과, 2등급으로 중경외시도 못간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212로 기억합니다.
지금도 왜 이렇게 단기간에 성적이 많이 올랐는지는 의문.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고3 내내 정석만 봤음에도 불구하고 4등급에서 올라주질 않는 수학 성적이 1등급을 찍었다는 사실이였습니다.
B형을 A형으로 착각해 2등급인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기뻐하며 소리없이 '아싸! %^&%*$'
다시 한번 확인해보니 이게 웬일, 문과는 A형이였네, A형 등급컷 1등급.
자축기념으로 집에가서 무한도전을 봤던 기억이 나네요.
유재석은 실제로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한명입니다.
무슨 여의도 부근의 추격전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날, 별 재미없던 추격전에서 어떻게든 방송분량을 뽑아내려고 마지막까지 애를 쓰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느 일본 작가의 다짐처럼 '다들 열심히구나. 나도 열심히 해야지.'
어제 고속버스 안에서 무한도전을 틀어주더군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요제.
끝나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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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쓰자면 길게도 쓸 수 있는 제 작년 겨울.
저는 항상 모의고사는 형편없었지만 저의 모교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미적분도 못하는 주제에 내신은 항상 상위권이였습니다.
부모님도 제가 공부를 하든 안하든 별 관심이 없으셔서 저는 '그냥 그런가보다.'
별 공부를 하지 않다가 고3 여름쯤으로 기억합니다.
어쩐지 '아, 수능 공부를 해야겠다. 이러다 죽도 밥도 안되겠다.' 하며 '그나마 잘하는 영어를 파야지.'
수능은 4422.
수학과 영어는 정말 각각 백분위 63, 89인가로 등급컷에 걸려있었습니다.
어떻게 수능 최저를 맞추어 학생부로 써놓은 지거국 경영학과는 두군데 붙고 한군데 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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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냥 가려고 했습니다.
'뭐.. 그냥 이렇게 된거 가야지.'
수능 끝나고 펑펑 놀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유난히 좋아하는 문명도 실컷 해봤고, 기타도 배우고, 노래방도 많이 다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알바도 해보고, 친구네 집에서 외박도 해보고 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어느 날 친구네 집에서 외박을 하면서 노는데..
사내 5명이 컴퓨터 한 대로 할 수 있는 것이란, 뭐 별로 할것이 없어서;; 포커였던가 카드게임을 했습니다.
그냥 카드게임을 했습니다.
밤새도록 카드게임을 했습니다.
뭔가 하면서 '별 재미도 없어지는데 이걸 왜 주어진 의무마냥 날밤새면서까지 이 시간낭비를 하고 있나.'
이즈음해서 이상하게도 노는게 별 시답잖아졌고, 그냥 자전거 끌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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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집앞에 보습학원을 다녔었는데 거기있던 수학선생님은 아주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저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신 분인데 특이하게도 그 선생님은 중학교 때 저에게 무영탑같은 소설이나 심지어 플라톤같은 어려운 고전을 주시며 수학 숙제보다도 책을 읽어오라는 숙제를 내주셨습니다.
몰론 제가 그 책을 읽은 적은 거의 없었다만..
그 이후로 어떻게 계속 연락이 닿아 고2 여름즈음해서 그 분에게 수학을 배웠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 선생님은 이상할 정도로 수학 진도는 더디게 - 그러니까 1년동안 정석 2권을 다 못뗀 정도의! - 나가시고 그 대신에 계속 책을 권해주시고 막상 수업시간이 되면 수학 이외의 이야기 - 정치, 사회, 문학, 철학 등.. - 가 절반 이상이였습니다.
몰론 제가 고전같이 어려운 책을 읽지 않는다는걸 아셨는지 그나마 쉬운 책들을 계속 권해주셨고 저는 그 덕분에 책 읽는 습관이 좀 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대학을 들어갈 때가 되서야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갑자기 공부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도통 모르겠는데, 그냥 책을 읽다보니 공부를 하고 싶었다고 밖에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제가 왜 재수를 시작했는지, 그 동기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꼬집어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대학가면 맨날 놀 줄 밖에 모르는 인간마냥 놀기만 할 것 같은데 실패하더도 괜찮으니 그냥 공부를 해보는게 낫지 않을까?' 였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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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수능이 11일 남은 이 시점,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는지?
자기성찰에 빠진 재수생 놀이하나.
여름이 시작되기 전 즈음해서 더이상 독재로 버티기 힘들어 서울로.
왜 그 큰돈을 들여가며 서울로 보내달라고 떼를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울이나 지방이나 거기서 거기던데.
저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중간중간, 특히 여름에는 엄청나게 지쳐버려 때려치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있을 정도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했습니다.
'조금만 더 할걸..'
몰론 더 열심히 했다면 조금 더 공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그 당시로서 저의 최선.
평균 4시간 공부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바뀌어 8시간을 한다든지 10시간 하던 사람이 갑자기 평균 14시간을 한다든지 하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기 때문에.
저는 제가 그 당시 저로서 제가 힘닿는 만큼 열심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후회는 두지 않겠습니다.
이제 수능이 11일 남았습니다.
어느덧 12시가 넘었네요.
어언 2시간 가량 제 나름의 공개 다이어리를 쓰는 동안 시간 아깝다고도 그만 두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제 나름대로 지금까지의 재수 생활의 생생한 기록으로써 가치를 둔다면 그리 아까운 시간도 아닐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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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은 저를 무작정 서울로 보내주고 막 그럴만한 형편은 아니기 때문에 연고서성한 정도가 아니라면 미련없이 교대나 지거국을 가기로 부모님과 약속했습니다.
흠.. 부끄럽지만 진실되게 다이어리 대신 쓰는 것이니.
사실 지금 제 성적을 본다면 많이 올랐긴 했으나 정시로 서성한을 뚫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정시로 명문대 가시는 분들은 거의 대부분 고등학교 때부터 착실히 준비해온 분들이고 하니, 처음부터 그런 점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때문에 논술을 준비한 것이죠.)
짐작컨대 11일 뒤 제가 받을 수능성적은 3월 정도 나올 것 같습니다.
이 역시 2등급 맞던 학생이 갑자기 수능 때 올1이 나온다든지 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기 때문에.
그러나 또 모르는 일이죠.
3등급이 뜰지 1등급이 뜰지.
또 제가 운좋게 논술에 붙어 서울 안의 대학을 다닐지 어떨지는 저도 확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제가 11일 뒤 받을 성적은 그날 다른 요소에 상관없이 제가 지금까지 노력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나오더라도 삼수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1년 동안 열심히 했기 때문에 '조금만 더 했다면..', '고딩때 공부 좀 할걸..' 하는 생각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고 남은 11일도 최선을 다해 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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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11일 남았음에도 이렇게 길게 타자를 두드리는 사치를 부리다니..
더 이상 글을 늘린다면 저로서도 할말이 없어지게 됩니다.
전국의 모든 수험생 여러분.
끝까지 열심히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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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공통점을 찾기가 힘든 것 같다. 여기 다 쓰자니 믿고 끝도 없을 것 같고비교...
비슷한 반수생 입장으로서 정말 공감가는 글이네요...
실제로 재수생들은 수능시험보고 결과에 상관없이 펑펑 운다던데
예전엔 몰랐는데 이제는 이해가 가네요
우리 같이 남은 11동안 파이팅해요!! 꿈은 이루어진다!
재수생의 1년간 한 맺힌 울음이죠.
시험끝나고 가족들이랑 집에서 저녁먹으면서 대성통곡.
절절하네요.
저는 이렇게 담담하고도 자유로운, 그러면서도 솔직하고 잔잔한 감동이 있는 스토리를 좋아합니다.
제가 글을 이렇게 쓰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남은 시간 힘내시고, 꼭 원하시는 성과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와 글 되게 잘쓰십니다.(머릿속에 이미지가 막 그려지네요)감동이예요 ㅠㅠ 힘내십쇼!!
그 수학샘덕분에 책을 읽으셔서 그런지 글이술술 잘 읽히네요-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글을 참 잘쓰세요.. 내년에 수능을 보게될 장수생으로서 2014년 저의 미래의 모습도 함께 그려져서 더욱 와닿네요. 다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재수를 결심하게 되는것이겠죠. 저역시도 모르겠습니다. 뒤늦게 왜 이제와서 교대로 가야겠단 생각이 드는지는. 어느날 불현듯 든 생각이 이렇게 커졌네요. 어디서 공부하건 상관이야 없겠지만 저역시 서울로 올라가서 공부를 하게되네요..고3때 깨닫지 못했지만 누구에게나 다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지금 행복하구요. 공부하는 동안 힘든시기도 찾아오겠지만 스스로를 다독이며 1년을 멋지게 달려봐야죠. 마지막 남은 기간 잘 마무리하시고 수능에서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글솜씨가 놀랍네요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