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결 [425768] · MS 2012 · 쪽지

2013-09-04 11:31:42
조회수 4,778

이안의 우문현답 - 9평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

게시글 주소: https://video.orbi.kr/0003820317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사실, 정말 중요한 것들은 그 후에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 C.부코우스키 -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전국 수석이란걸 해보았다. 당시 모의고사계를 양분?! 하고 있었던 중앙과 종로에서 각각 한번씩 해보았는데, 참 쪼잔하게 상품으로 무슨 모니터인가를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PC본체도 아니고 모니터만!

학원 수강생들이나 같이 일하는 정선생, 페로즈는 이미 알고 있는 얘기겠지만 나는 예체능 특기자였다. 
현실(이라고 거창하게 쓰고 부모님이라고 읽는)과의 타협을 통해 결국 고등학교에 들어와서야 급히 인문계로 전향했지만, 예상대로 모의고사 성적은 불지옥의 바닥. 고교 1학년 첫 모의고사에서 반 최하위였나 밑에서 세 번째였나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여기까지 읽고 아 또 지 졸라열심히 공부해서 짱먹었으니 너네도 나본받아 열심히좀 해봐 이런 뻔하디뻔한 스토리구나 생각했다면 오산.
그래 물론 열심히 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고1 꼴등이 고3 수석했어요 이딴 인간극장 스토리가 아니다. 그걸 내가 끝까지 지켜서 수능 수석을 했다면 모르지. 하지만 나는 결국 예상대로 수능에서 수포자답게 수학 폭망을 기록했고, 다른 영역에서 모두 최고득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에 광탈해야 했다. 종합성적도 전국 수석과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그게 바로 내 프로필에 수능 수석이 아니라 수능 언어영역 수석으로 적혀 있는 이유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대체 6평이건 9평이건, 왜 그렇게 떠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 번도 모의고사 같은 건 전혀 신경써본 적이 없다. 내가 학부생들에게 LEET를 가르칠 때도, 고3들에게 논술을 가르칠 때도 항상 강조하는 건데, 뭘 하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부터 신경써야 한다. 모의고사의 의미는 대체 뭔가?

현재 자신의 객관적 위치 진단 어쩌고... 이건 개소리다. 객관적으로 위치를 진단해서 어쩔 건데? 지금 내가 전국 9천 등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목표하는 건 전국 천등 안쪽인데, 뭐 얼마나 한숨쉬어야 할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되나?

천만에, 모의고사의 기능은 딱 하나다. 자신의 주관적 상태 파악이다. 남은 60일을 어디다 써야 될지만 알면 된다. 어느 과목 파이널에 시간을 투자해야 할지 판단하는 기능이 전부다. 그거 빼곤 모의고사는 정말 백해무익한 존재다. 벌써 7년째 수험생들을 보아 오는데, 모의고사란 게 도움이 되는 경우를 거의 보질 못했다. 잘본 놈들은 잘봤다가 신나서 쳐놀다가 망하고, 못본 놈들은 ㅅㅂ어떡해 하면서 안그래도 귀중한 60일 중 일주일을 싱숭생숭 날려버린다. 진짜 성공하는 애들은 어떤 경우냐고?

간단하다. 내가 정말 리스펙트하던 친구처럼 하면 된다. 이 녀석은 항상 반에서 상위권이었지만, 그렇다고 뭐 전국에서 노는 그런 레벨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녀석의 장점은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 때는 거의 2개월에 한 번 사설 모의고사를 쳤는데, 이놈은 그냥 모의고사를 칠 때마다 채점 후 애들이 난리법석을 떠는 동안 조용히 오답노트를 만들어 놓고 떨어진 과목, 오른 과목을 자기 수첩에 기록해놓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공부 시간표를 수정한다. 수학이 올랐으니 한 시간 줄이고, 영어가 떨어졌으니 한 시간 늘리고. 

정말 간단하지만, 이거야말로 필승비법이다. 이놈은 타인이 뭘 하든 관심이 없다. 단지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수험생에게 이건 건 축복에 가까운 재능이다. 내가 뭘 해야 뭘 얻을지, 정확히 판단하는 것. 그런데 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는 이걸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의고사를 치는 거다. 내가 뭘 해야 할지, 가상의 출제자들에게 물어보는 것. 그게 전부다. 게시판에서 키워들에게 물어볼 필요는 전혀 없다.

이렇게 말해도 당분간 '모의고사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힘들 수험생들을 위해, 지금은 현직 판사로 강원도에서 울부짖고 있는 모군의 대학 시절 이야기로 글을 끝맺겠다.

법대생들도 사법시험 모의고사를 친다. 10월쯤엔가 전범위 모의고사를 치르고, 다들 술마시러 가던 중이었다.
이안: 님 어디감? 
K: 국제법 진모(진도별 모의고사) 책사러감요  ㅂㅂ
이안: 오늘은 다들 노는날임 오바하지 마셈 컴온요 오늘 9시간 시험밨자나
K: 9시간 시험만 봤지 공부는 하나도 안했자나 
이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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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상이상>< · 431960 · 13/09/04 12:04 · MS 2012

    좋은글 감사합니다~ㅎㅎ 캡쳐해두고 두고두고 봐야겠어요

  • 한련s · 457114 · 13/09/04 13:36 · MS 2013

    심적인 부담이 안생길순없죠.
    그냥.. 무거우면 무거운대로 짊어지면 그뿐

  • 은결 · 425768 · 13/09/04 13:49 · MS 2012

    그겁니다. suck it up! 하고 가야 하는 거죠.

  • 주제사라마구 · 416008 · 13/09/04 14:37

    저기..오르비 논술은 얼마 정도 하나요?ㅜㅜ

  • 은결 · 425768 · 13/09/04 14:42 · MS 2012

    파이널은 대치동과 똑같을 겁니다. 회당 10만원 정도 할 거예요. 특강 첨삭비 교재비 뭐 그런 명목으로 추가요금 붙는 게 없으니까 실제로는 오르비가 더 싸겠지만. 저야 학부 졸업생들을 가르치니까 훨씬 더 고액에 익숙하지만, 고3 수험생들에게 논술학원들의 파이널 단가가 부담스러울 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군요. 고대 파이널 때는 조금 더 낮추어 보자고 정선생, 페로즈와 의논중입니다.

  • Epicurean · 441656 · 13/09/04 15:05 · MS 2017

    회당 10만원이라는게 추석특강과 직전특강이라고 말씀해놓으신 약 11일 가량 각각을 말하시는 건가요? ㅠㅠ

  • 은결 · 425768 · 13/09/04 22:14 · MS 2012

    제 삶은 매우 스토아 학파적인 것이었습니다만.. 아무튼 말씀하신 바가 맞습니다. 1일 1회로 간주되니까요. 뭐 로컬 마켓의 모 학원들은 회당 11을 매기고도 모자라서 교재비를 걷기도 한다지만요ㅍㅍ 전문대학원만큼은 아니지만 학부 입시의 사교육비 부담도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은 합니다.

  • 연세영문14학번 · 434385 · 13/09/04 15:11

    다른격려글봤지만
    은결님게시글첫문장 부코우스키의 한문장을보고 힘들어하고있는지금제자신을불러일으켰네요 감사합니다

  • 물량공급 · 311238 · 13/09/04 16:12 · MS 2009

    더이상 수험생이 아니지만 제가 하고싶었던 말들을 잘 표현해주셨네요

    추천드리고갑니다

  • 정허니 · 438875 · 13/09/04 16:18 · MS 2012

    마지막...?!가인상깊네요

  • 오르비 꺼라 · 421176 · 13/09/04 17:19

    마...지 ...막..글.. 머임 가슴에 진짜로 와닿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