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roskairos [660372] · MS 2016 · 쪽지

2020-12-17 10:04:07
조회수 17,396

4년만에, 그리고 100일간 준비한 수능에 대한 나의 생각 (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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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수능을 봤던 열 아홉살 학생. 

서울대 건축학과를 가고싶어 지구과학 2를 선택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17 지2 백분위 100 아 ㅋㅋ) 

수학 가형을 5등급 받았지만 가지고 있던 미술활동을 최대한 활용해서 홍대 미대에 갔습니다. 

미술은 적성에도 잘 맞았고, 학교에서도 꽤 상위권을 유지했던 것 같습니다. 나름 작가나 사업쪽으로 유망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가구 사업을 해서 이태원, 홍대, 수원에 카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왜 내가 의대를 가고 싶었을까,

군대에서였나, 유튜브를 보다가 외과 수술 영상을 보는데 가슴이 뛰더군요. 

내가 톱질하고, 끌질하고, 나무를 깎아서 무언가를 만드는 걸 참 잘하는데, 그 정교한 손으로 사람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스물 한 살이었고 (2018년) 늦었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네요. 


병장쯤 돼서 할 게 너무 없으니 2019수능을 도서관에서 한 번 풀었던 기억도 납니다. 

국어 영어가 2등급은 나오길래 감은 살아있다 싶긴 했는데, 그땐 스물 두 살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어요. 


전역 후에 항상 마음 한켠에 의사에 대한 꿈이 있었지만, 미루고 계속 미뤘네요. 고3때 너무 힘들었던 생각을 하니 공부를 다시 하기가 두려웠던 거죠. 그래서 전공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하루에 운전을 거의 120km씩 했어요. 분당에서 홍대로, 홍대에서 을지로로, 또 수원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미팅을 보고, 설계를 하고, 외주를 맡기고... 나름 재밌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스물 세 살 2학기 개강을 앞두고, 이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통장에 돈이 많이 들락날락하는걸 봐도 행복하지가 않던, 적성과 진로가 다를 수 있다고 느꼈던 8월의 어느 날 저는 입시를 하기로 맘먹습니다. 

다들 만류하더라구요. 아무리 네가 공부를 했었다 해도 너무 늦었다고, 수능 4년동안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3년동안 미루고 미뤄왔고,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순간이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처음 공부를 시작하던 날, 6월 모의고사를 봤을 때, 국어는 79점, 수학은 41점, 영어는 70점(...) 탐구는 10점, 30점 나왔어요. 

당시에는 있었던 여자친구나 부모님 모두 점수를 듣고 한숨을 푹 쉬었었죠. ㅋㅋㅋ


그때부터 매일 공부를 죽을듯이 했습니다. 국어는 국어의 기술과 기출문제를 분석하고, 영어는 EBS만 엄청 파고, 수학은 정석부터 시작해서 기출문제를 정말정말 많이 풀었어요. 탐구는 인강 커리와 교과서 개념을 읽고 또 읽고,,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수능이라는 시험은 암기시험이 아니기에 사고력을 최대한 효율화하고 필요한 지엽을 막판에 숙지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문법은 솔직히 버리고 간 것 같아요. 후회되긴 하네요. ㅎㅎ 


수능이 50일 남았나? 갑자기 차였어요. 그냥 차인 것도 아니고, 엄청 상처를 주는 말들을 들으면서 차였어요. 차라리 입시하는 걸 못기다리겠다, 아니면 내가 싫다 마음이 사라졌다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냥 일방적으로 통보와 잠수를 해버리니 공황이 오더군요. 많이 좋아했던 친구라 거의 20일은 아무것도 못 하고 독서실 벽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내가 뭘 잘못했나 이상한 소문을 들었나 별 생각들이 다 들고 눈물이 하염없이 나오고, 입시를 왜 시작했나 자괴감도 엄청 들었네요. 

수능 30일 전 쯤에 정신을 차렸어요. 신앙이 있는데, 기도하면서 어느 날 회복이 되었어요. 기운 차리고 다시 독서실로 돌아갔죠. 


수능은 국어 91점 (문법 3개 틀렸습니다 ㅋㅋㅋㅋ) 수학 78 영어 90 탐구 48 47 이렇게 나왔네요. 

수학이 많이 아쉽죠? 첨에는 좀 속상했어요. 근데 생각해볼수록 감사한 점수라는 결론이 나오네요. ㅎㅎㅎ 탐구는 수능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40점이 안나왔었고, 국어 영어도 완성된 실력이 아니었거든요. ㅋㅋㅋ 다만 입시를 시작할 때 모토로 잡은, 최대의 사고 효율화 전략은 통했다고 생각해요. 수학은 10점이 실수로 날아갔지만, 이정도면 제 실력 치고 선방했다고 생각합니다. 


논술도 없고, 정시만 3장 남은 상황에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붙을만한 곳을 써봐야 하나 싶기도 했고, 머리가 참 복잡했는데 지금 내린 결론은, 의대 2개 한의대 1개 쓰자는 겁니다. 표점합이 393정도 나올 것 같은데, 입시 분석을 해보니 완전 불가능은 아니다 싶어요. 홍대에 가겠다고 했을 때도 다들 불가능이라고 했는걸요. ㅎㅎ 그래서 3개 다 상향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만약 붙는다면 24살 새내기가 되겠죠. 나름 레전설 입시가 되겠죠? 

떨어지면 복학을 할 생각입니다. 부모님 눈치가 좀 보여서, 무휴학으로 22수능을 칠 생각이에요. 

내년에 붙는다면 25살 새내기가 되겠죠. 나름 괜찮아요. 스물 다섯 젊어요. ㅋㅋㅋ

떨어지면 졸업을 할 생각입니다. 학위 두개 따고 좋죠~ㅋㅋㅋ

졸업까지 하고도 입시가 안되면 학사편입을 하든 23, 24 수능을 치든 어떻게든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이젠 있습니다. 


이번에 입시를 하며 느낀 건, 늦은 나이란 건 없다는 것이었어요. 생각보다 주변엔 다양한 나이에 새로운 걸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인생은 속력이 아닌 속도라는 걸(벡터,,) 알게 되었어요. 누군가에게 차이는 경험을 하며 멘탈도 훨씬 단단해졌구요. 

앞으로 제가 글을 자주 쓰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일이 생긴다면 2016년부터 제가 참 좋아했던 이 오르비에 꼭 글을 쓸거에요. 

만약 몇 년이고 소식이 없다면, 열심히 무언가 준비중인거겠죠 ㅎㅎ 


오르비에게 고맙습니다. 좋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고, 최대의 효율로 공부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

추운 날씨 모두들 조심하시고, 늦었지만 2021수능 준비하신 모든 수험생 여러분들 (특히 98 칭구들) 모두 수고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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