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cri [2] · MS 2002 · 쪽지

2011-10-22 07:48:50
조회수 23,555

수능 D-19 남은 시간 어떻게 보낼까

게시글 주소: https://video.orbi.kr/0001910689

  내가 첫 수능을 볼 때는 수시모집에 할당된 정원이 10% 도 되지 않았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수능 시험을 잘 봐서 정시모집 전형으로 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고, 내신이 나쁘면 수능 시험을 더 잘 봐서 거의 수능 시험으로만 선발을 하는 특차 전형으로 대학에 가야 했다.


  그런만큼 수능 시험은 고등학교 3년 내내 조준을 하고 시험 당일 방아쇠를 당겨서 명중을 시켜야 하는,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부담이자, 결국은 내가 원하는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해준 디딤돌이 된, 나에게 있어서는 영원한 애증의 대상이다.


  10대 후반은 내내 수능 시험을 생각하며 산 셈이고, 첫 수능을 본 후 결과에 만족하지 못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3번의 시험을 봤고, 서울대에 합격한 이후에는 수능 시험이라는 게 나의 업무 대상이 되어, 시험 당일에는 학교 수업에 출석을 하지 않고 3번 더 시험을 봤으니, 도합 6번의 수능 시험을 본 셈이다. 심지어 대학교 1학년 때에는 인근 학원에서 평가원 모의 수능까지 다 치렀다.


  아직도 수능 시즌, 원서 접수 시즌이 되면 일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에, 요즘처럼 날씨가 슬슬 추워지면 수능이 다가오는 게 제일 먼저 느껴진다. 마지막 시험을 치른지 7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언어 영역은 이렇게 해라 수리 영역은 이렇게 해라 꼬치꼬치 짚어주기보다는, 생활 태도 측면에서의 조언이 더 합당할 것 같아서, 수능 시험을 19일 남겨놓은 수험생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들을 정리했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때인가


  수능 점수를 400점 만점으로 변환해 계산할 때, 백의 자리는 20년 동안 살아온 기록이 반영을 하고, 십의 자리는 고등학교 3년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결정하며, 일의 자리는 그날의 컨디션과 운이 결정한다. 냉정하게 말해 지금 시점에서 백의 자리와 십의 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다. 다만 380점을 받을지 389점을 받을지는 앞으로 하기에 달려있다.


  올해 같이 난이도가 낮을 것으로 예상되는 시험에서 0.5점, 1점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수능 시험 당일에 가채점이 끝나고 2~3시간 동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93년에 첫 수능이 실시된 이후 지금까지 치러진 모든 수능 시험 중에서 가장 쉬웠던 01학년도와 08학년도 수능 시험의 예를 들어 보자. 01학년도 때에는 컨디션 조절 실수로 일의 자리에서 만점을 찍지 못하면 바로 서울대 법대는 포기해야 했다. 08학년도 때에는 수리 영역에서 한 문제 실수를 하면 최하위권 의대에도 자신 있게 원서를 낼 수 없었다. 심지어 01학년도 때 389점을 받은 학생은 내신 성적이 좋으면 서울대에도 합격했지만, 380점을 받은 학생은 상위권 전문대에 가기도 했다.


  남은 19일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평생동안 안고 갈 출신대학 간판이 왔다갔다 한다.



그러면 무얼 해야 하나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일의 자리를 지키는 전략’을 짜야 한다. 운은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좌우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컨디션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학적으로 인간의 몸이 완벽하게 시차 적응을 하는 데에는 1개월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낮밤을 바꿔살던 사람이 아침형 인간이 되는 정도의 도전에 해당하는 경우고,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2~3주 정도면 자신이 원하는 생활 리듬에 몸을 적응시킬 수 있다. 즉, 지금은 몸을 수능 시간표에 맞추어 적응시켜야 하는 때이다.



11시 넘어가면 컴퓨터를 끄고, 소등하자.


  공부할 게 더 남은 것 같아도, 오르비에 꼭 읽어야만 할 EBS 선별 문제가 올라온 것 같아도, 내일 아침 6시에 보기로 하자. 컴퓨터는 끄고, 불도 끄고, 11시에는 잘 준비를 시작하자. 평소 그 시간에 깨어 있었다면 바로 잠에 들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며칠은 1시나 2시까지 깨어있을 수도 있다. 내 몸더러 그러고 싶으면 그러라고 해라. 다음주 정도에는 12시가 되기 전에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준비해 두지 않으면 수능 당일에 2시간 자고 시험 보러 가게 되는 수가 생긴다.



수능 바로 전 날은 잠이 거의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한다는 부담 그 자체가 너무 강하면 수능 전 날은 잠을 별로 못 잘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 그래도 생활 리듬 조절이 이전부터 어느 정도 잘 되어서 며칠 동안 꿀잠을 자둔 걸로 수능 당일의 수면 부족에 대한 저항이 생기느냐, 아니면 * 막판까지 수면 시간 조절을 하지 못해서 뇌가 피로한 상태에서 시험에 임하느냐에 따라 시험 점수가 크게 벌어진다. 두 경우의 차이는 수능 점수 10점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요소다. 어쨌든 무조건 11시가 되면 자러 가자.



생활 리듬을 수능 시험에 더 맞추자.


  보통 7시 정도까지만 일어날 수 있으면 수능 당일에 큰 문제 없이 시험을 치를 수 있다. 하지만 5시 30분에서 6시 30분 사이에 일어나는 연습을 해두면 1교시 언어 영역 듣기 평가부터 맑은 정신 상태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다. 흔히 뇌는 깨어난지 2시간 이후부터 가장 활성화된 상태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가는 시간도 되도록이면 시험이 치러지는 시간은 피하도록 맞추어 보자. 듣기평가 도중에 화장실이 너무 급해지면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억울한 경우 때문에 젊은 시절 1년을 더 희생할 것인가? 보통은 화장실 시간도 노력으로 조절할 수 있다.



모든 공백을 메우겠다는 욕심은 버리자.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내 지식에 빈틈이 많다는 것을 과장해서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내신 시험 시작 직전까지 책을 뒤척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수능 시험은 그렇지 않다. 시험 전 날 내가 모르던 걸 새로 알게 되어, 그 문제가 공교롭게도 실제 시험에 나와 2~3점을 세이브할 확률은 거의 없다. 따라서 지금 수능 시험을 정복하겠다는 무리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 좋다. 20일을 남겨두고 25일 동안 공부할 수 있는 양을 책정해 놓고 자신을 몰아붙이다 막판에 생활 리듬이 깨지고 면역력이 떨어져서 열 펄펄 끓고 콧물 줄줄 흘리며 수능 시험을 보게 될 수 있다. 나는 심지어 시험 보다 잠깐 기절까지 했다. 아까 2시간 자고 시험보러 간 것도 다 내 얘기다. 처음에는 시험을 볼 때마다 최악의 조건에서 치르게 되는 내 자신을 보고, 운명을 탓하곤 했지만, 지금 되돌이켜 보면 내가 무리한 욕심에 내 몸을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너무 어려운 문제를 풀면서 스스로를 옭조이지 말자.


  그 문제 올해 수능 시험에 안 나온다.

 


촐랑대지 말아라.


  지금부터라도 촐랑대지 말아라. 수능 시험에 대해, 대학 진학에 대해, 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좀 더 진지해져 보자. 마치 수양을 하러 절에 들어온 것처럼 남은 19일 동안은 불필요한 말은 줄이고, 수도승의 마음으로 살아 보자. 오르비에 악플 달며 빈정거리지도 말고. 앞으로 하루에 10분씩 3번 정도는 고요한 마음으로 명상을 해보자.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올해 수능 시험이 쉬울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 쉬운 시험에서는 실수 한 문제가 대학을 가른다. 4/9를 2/3으로 약분하는 실수는 촐랑대는 마음, 진지하지 못한 자세에서 시작된다. 이성적인 사고는 빠르게 하되, 감정의 흐름은 통제하는 연습을 하도록 하자.



내 자신이 해온 공부, 살아온 삶에 대해 좀 더 정직해 지자.


  무조건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하면 실수했을 때, 또는 예상 밖으로 특정 영역이 어렵게 출제되었을 때, 그 다음 쉬는 시간에 무너져 버릴 수 있다. 인생 전체를 두고 보면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수능 시험은 베스트 셀러 책들이 지시하듯, ‘I’m happy, everything’s gonna be alright.’를 되뇐다고 다 해결되지 않는다.


  아는 문제인데 틀렸다. 하필 내가 모르는 부분만 출제된 것 같다. 유독 탐구 영역 한 과목만 너무 어려워서 시간이 부족하다. – 모든 것이 다 내 업보다. 내가 너무 운이 없어서도 아니고, 출제가 나를 벌하기 위해서 그런 문제를 낸 것도 아니다. 또한 내가 하필 수능 시험을 19일 앞두고 그 부분을 공부하지 않아서 틀린 것도 아니다. 짧게는 지난 3년, 길게는 12년 동안, 내가 그 부분을 맞힌 학생보다는 덜 공부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정직하게 이 사실을 받아들이자. 그래야 마지막 한 문제까지 내 실력으로, 내 진정한 컨디션으로 임할 수 있다.


  수능 성적은, 냉정하고 정직하게 내려지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받아드는 내 자신에 대한 중대한 평가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대신 마지막까지 진지하게 임하고, 집중하자.


  이런 시험에서 내가 보이는 태도가, 내가 내 자신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다. 수능 시험이 내 실력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변명만 하는 학생은 인생에 대해서도 평생 변명만 하다 죽고, 수능 시험 도중에 조는 학생은 인생도 졸다가 죽는다.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